빌레몬서 1장 12-16절
종이 아닌 형제로 받으라
찬송가 268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1:12 내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내는데 그는 내 심장입니다.
1:13 나는 그를 내 곁에 머물게 해서 내가 복음을 위해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 나를 돕게 하고 싶었습니다.
1:14 그러나 그대의 동의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는 그대의 선한 일이 억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15 그가 잠시 그대 곁을 떠나게 되었던 것은 이 일로 인해 그대가 그를 영원히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1:16 이제부터는 그가 더 이상 종과 같지 않고 종 이상, 곧 사랑받는 형제 같은 사람입니다. 특히 내게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 안에서나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종이 아닌 형제로” 이와 같은 제목으로 빌레몬서를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사실이지만, 사도 바울은 참 능력 있는 전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저 사람이 변화될 수 있지?’ 했던 사람이 바로 오네시모였는데, 오네시모 같은 사람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지식과 지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어떤 능력이 있었는가? 아마도 바울에게는 한 영혼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긍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레몬 장로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던 노예 오네시모를 만나게 되었을 때, 단지 그의 노예신분 때문에 무시하거나 하대하지도 않았고, 범죄한 경력을 들춰내면서 정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품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심지어 그의 앞날을 열어주려고 빌레몬에게 대신 용서를 구해주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예 오네시모 때문에 손해 본 게 있으면 그것을 자기가 대신 보상하겠다고까지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바울 속에 담긴 사랑과 자비, 긍휼은 예수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바울에게 주신 사랑이며, 그 사랑의 주님이 바울 속에서 역사함으로 바울을 통해 놀라운 사랑의 모습이 나타난 줄 믿습니다.
빌레몬서를 통해 죄인을 품으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오늘도 기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을 한 절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어제 함께 읽었던 10,11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1:10 갇힌 중에서 낳은 내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그대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1:11 전에는 그가 그대에게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내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가리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0절에, “갇힌 중에서 낳은 내 아들 오네시모..” 그리고 11절에 “그대와 내게 유익한 사람..” 이라고 합니다.
참 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범죄한 한 사람을 낙인찍지 않고, 주의 사랑으로 품어 주었습니다.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붙였던 수식을 동일하게 사용하여 “아들” 이라 했고, “유익한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네시코는 곧 내 심장이라고 표현합니다. 12절입니다.
1:12 내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내는데 그는 내 심장입니다.
심장은 무엇입니까? 심장은 온 몸에 피를 돌게 하는 신체기관으로써, 몸의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 중 하나입니다. 심장은 항상 건강하게 뛰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심장이 뛰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만큼 심장은 중요한데, 이 귀한 심장을 오네시모에게 붙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긍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남들은 다 손가락질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품고 심장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바울 속에 함께 하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행하는 바울처럼, 삶의 모든 자리에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다음 13절입니다.
1:13 나는 그를 내 곁에 머물게 해서 내가 복음을 위해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 나를 돕게 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향한 자신의 계획을 빌레몬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을 감당할 때 자기를 돕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모가 과연 바울을 도울 수 있을만한 역량은 있었을까요? 아마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젊은 힘과 건강, 기술과 능력, 심지어 복음을 듣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까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고 사용하고 싶다고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이전에는 죄 많은 노예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서 복음에 협력하고 싶은 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보면서 우리 역시도 성장성숙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일할까?’ 찾는 이들에게, 곁에 두고 싶은 동역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장하도록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늘 말씀과 기도에 힘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 14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1:14 그러나 그대의 동의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는 그대의 선한 일이 억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위해 어떻게 했을까요? 오네시모를 내게 보내줄 수 있느냐고, 오네시모를 내 곁에 둬도 되겠냐고 허락과 동의를 구합니다. 상반절에 “그러나 그대의 동의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네시모를 자기의 필요에 따라 쓰기 위해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데려다 쓰겠다.” 통보해도 사실 아무 문제가 없었을텐데 그렇게 독단적으로 밀어부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하며 허락과 동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냈을 때 생길 수 있는 크게 세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화가 끝까지 났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하였지만 바울에게 되돌려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바울에게 되돌려 보내 바울을 돕게 하는 것입니다.
이 중 바울이 원하는 바는 세 번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과 기대하는 바를 위해 빌레몬을 내가 데리고 있겠다라던지, 당장 보내라던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허락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도 바울의 인격과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는 것은, 나는 내 권한과 지위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인격과 권한을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특히 나보다 낮은 위치의 자녀나 직장 후배, 형제간의 동생 등 여러 인간관계에서 나를 앞세우고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는지, 나아가 앞으로 더욱 다른 사람을 나보다 높이며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늘 주 안에서 겸손으로 행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 1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바울과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봅니다.
1:15 그가 잠시 그대 곁을 떠나게 되었던 것은 이 일로 인해 그대가 그를 영원히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오네시모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 빌레몬을 떠나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통해서도 선하게 사용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조차도 선하게 바꾸셨습니다.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과 잘 아는 바울을 만나게 하셨고,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셨고, 결국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바울의 중재를 통해 주인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용서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의 깊고도 깊은 지혜와 지식, 크신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시고, 그 분의 섭리대로 우리 삶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또는 여러 역경과 고난이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견고한 믿음으로 서 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늘 선하게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 16절입니다. 바울은 더 확실히 자신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읽어봅니다.
1:16 이제부터는 그가 더 이상 종과 같지 않고 종 이상, 곧 사랑받는 형제 같은 사람입니다. 특히 내게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 안에서나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보시면, 오네시모를 종 이상의 존재로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지난 날의 과오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특히 내게 그렇다면..” 이라고 했는데, 이 구절은 사도 바울에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즉, 내게도 오네시모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에게..” 바로 빌레몬 장로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너도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떤 학자는 오네시모가 돈을 훔쳐 걸려서 처벌받지 않고 싶어서 도망갔을 거라도고 하고, 로마에 가고 싶은 마음에 돈을 훔쳐 도망갔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힌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에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단지 금전적인 문제를 떠나서,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은 아니어서, 용서하라는 말이 쉬운 것이지 실제로 피해를 입은 빌레몬 입장에선 쉽게 용서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의 오네시모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능한 줄 믿습니다. 값없이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그리고 그 분이 성령으로 내 안에서 사랑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도우셔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우실 줄 믿습니다. 내 주변의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품고 용서하며 축복할 수 있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