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지막에 웃는 자
본문: 미가 7:10–13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미가 7:10–13 DKV
10 그렇게 되면 내 원수가 그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니 그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라고 했던 사람이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것이니 이제 그가 거리의 흙처럼 짓밟히게 될 것이다.
11 네 성벽을 건축할 날, 곧 그날에 네 영역이 넓어질 것이다.
12 그날에 앗시리아로부터 이집트의 성들까지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 바다로부터 저 바다까지, 이 산으로부터 저 산까지 사람들이 네게 나아올 것이다.
13 그 땅이 거기 사는 사람들 때문에, 곧 그들의 행위의 열매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다.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기억에 남는 경기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조금 오래된 경기이긴 한 데,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4강 진출한 기록이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이기도 했지만, 매 경기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경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6강 이탈리아와 경기가 그렇습니다. 전반에 1골을 먹고 후반 끝 무렵에 동점 골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연장 후반에 안정환 선수의 결승 골로 역적의 드라마를 찍은 경기였습니다.
이런 경기에 우리가 환호하는 것은 우리 인생도 그랬으면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은 비록 세상에 지는 것 같고, 지금은 비록 남들보다 못한 것 같은데,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라는 말처럼 나중에는 우리의 상황이 역전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분명히 역전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세상이 더 좋아 보이고 세상이 더 잘나 보여도, 마지막 날에는 원래의 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가 7:10 DKV
10 그렇게 되면 내 원수가 그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니 그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라고 했던 사람이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것이니 이제 그가 거리의 흙처럼 짓밟히게 될 것이다.
본문 앞 절인 8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죄를 범하여 심판받는 이스라엘을 보며 주변 나라들이 즐거워하고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폐허가 된 이스라엘을 보며 주변 나라들은 비웃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라며 비꼬며 말했습니다.
이 표현은 이방인들이 고난받는 이스라엘을 조롱할 때 자주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아주 큰 상처가 되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비속어 중에 ‘부모 없이 자라 버릇없는 아이들’을 말할 때 쓰는 ‘후레자식’이라는 말과 비슷한 어감입니다.
시편 42:10 DKV
10 내 원수들이 나를 조롱하며 날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말이 마치 칼이 내 뼈마디를 쑤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계시냐?” 라며 묻는 이 질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병사들의 조롱과도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27:42–44 DKV
42 말했습니다.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니 어디 한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어 주겠다.
43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당장 구원하시겠지. 자기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었다.”
44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께서 실패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상황이 역전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매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오히려 그렇게 비웃던 이들이 거리의 진흙과 같이 밟힐 것입니다.
요즘은 거리는 너무 깨끗합니다만, 과거의 거리가 얼마나 더러웠을지는 조금 못사는 나라만 가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중세에는 길거리의 오물을 피하고자 굽이 있는 나막신과 같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길에 짐을 질 짐승들이 함께 가는데, 요즘처럼 길거리에 배변한 것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고대 사회에서 거리의 진흙이라는 것이 황토처럼 순수한 흙이 아니라 오물과 같았을 것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했던 주변 나라들이 이제는 거리의 오물이 되고,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언제요? 심판의 날입니다.
로마서 16:20 DKV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서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마지막 때, 회복의 때, 심판의 때에는 일어날 일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경이 넓혀집니다.
미가 7:11 DKV
11 네 성벽을 건축할 날, 곧 그날에 네 영역이 넓어질 것이다.
성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가데르(גָּדֵר)”는 일반적인 성벽보다는 경계를 뜻하는 울타리 개념이 강합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될 때, 그 영향력이, 그 지경이 넓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8 DKV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듯,
하박국 2:14 DKV
14 마치 물이 바다를 덮는 것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 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때 많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단까지하면 온 유대 땅을 말하듯이, “~에서 ~까지”라는 표현은 가나안 전체 지역을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을 비웃던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 쓰인 “네게”라는 단어는 10절에서의 “네 하나님”과, 11절 “네 성벽”에서는 ‘너’라는 인칭 대명사와는 다릅니다.
10절과 11절은 여성형이 쓰였는데, 12절에서는 남성형이 쓰였습니다. 의도적으로 구분을 한 것입니다.
10절과 11절은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기 위해서 여성형을 썼다면, 12절은 의도적으로 남성형을 썼습니다. 사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입니까? 미가가 예언했던 사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미가 5:2 DKV
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비록 네가 유다 족속들 중 아주 작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너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의 근본은 먼 옛날,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을 비웃던 모든 나라에서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날에 주님의 백성이 주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억압에 눌렸던 이들이, 승리의 나팔을 불며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심판 날에는 상황이 역전됩니다.
미가 6:18에서처럼 세상을 따랐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황폐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모습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라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그렇게 비웃던 나라들이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 7:13 DKV
13 그 땅이 거기 사는 사람들 때문에, 곧 그들의 행위의 열매 때문에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도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정직하게 살다 보니 손해 보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보처럼 산다고 비웃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 참된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최후의 승자가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도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