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두가 죄인이다
본문: 롬 3:9-20
찬송가: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1)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오늘도 새벽예배에 오신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9)
9절을 읽겠습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1)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은 ‘우리는 나으냐’라고 말하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모든 인간, 인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죄 아래에 있다’는 것에서 이 ‘아래’는 헬라어로 ‘휘포’인데 그것은‘영향을 받다’, ‘지배를 받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모든 인간은 죄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다보면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설득시키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 러시아에서 한 말기 암환자를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한 선교사님이 러시아 암 환자들을 돌보시면서 전도하였는데 그분만 유독 전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운 적도 없었고 살인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크게 사람을 헤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마5:28의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 마다 간음하였느니라 라는 말씀 처럼 마음으로 짓는 죄도 범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우리 안에 마음으로 살인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음으로 품었던 죄들을 고백하며 우리가 죄인이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암환자분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었을 때도 그 당시 한 전도사님이 나의 마음을 찍는 카메라가 있어서 그 카메라의 영상을 저기 스크린에 띄운다면 나는 두렵고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때 나도 내 행동과 내 마음을 모두가 본다면 정말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회개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감옥에 갈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마음만을 보아도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신학자가 쓴 ‘죄는 어디로 갔나’라는 책에 보면 사탄의 전략이 죄를 자꾸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경찰서에서 벌금을 물거나 형을 살고 나오면 죄가 사라진다고 사람들이 믿게 만듭니다. 또 동성애와 여타 잘못된 죄의 모습들을 문화다, 다름의 차이다 등으로 말하며 사람들이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 굿윈이라는 청교도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죄는 죄인인 우리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의해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 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여러분 성경이 우리가 모두 죄인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판단을 겸손히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지옥갈 죄인은 아니어도 죄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말씀을 겸손히 인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회개하지 못하게 하고 죄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며 행복한 길을 방해하는 사탄의 전략과 속임수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의 영향력을 보혈로 씻으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죄에서 해방되고 온전한 자유자가 되는 길을 열어주시고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2. 죄의 모습들(10-18)
10-18절을 보겠습니다.
10 기록된 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18절은 죄인들의 모습, 죄의 여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0절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은혜 입은 자’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지 않으면 의로움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은혜 없는, 예수님 없는, 성령님 없는 인간은 절대로 선한 것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1절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물로 한번 태어난 사람으로 ‘자연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 위로(아노덴)부터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해 죄가 그 생명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사랑하고 죄를 짓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 보다는 미움이 더 쉽다는 것입니다. 감사보다는 불평 불만이 더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죄의 상태에 대해서 어떠한 사람들은 사망이 임한 상태 사망의 저주 아래 있는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영혼육이 죽은 상태를 말하는데 혼과 육은 서서히 죽고 육은 빨리 죽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이 죽은 상태이기에 영이신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이 죽었기에 하나님을 찾거나 은혜를 사모하지도 않고 그것을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인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승리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분별해 보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생각이 좀 적고 예수님이 자주 보이지 않으신다면 자꾸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3절에서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은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특별히 무익하게 된다는 것은 무익한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공허한 것 썩을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또 13-14절에서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은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며 혀로 속임을 일삼고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목구멍이 열린무덤이라는 것은 입으로 사람을 삼킨다는 것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속임이 있고 독사의 독이 있다고 하는데 독사의 독은 화살로도 번역되어 사람을 죽이고 상처주는 말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면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한 사람인지 분별하려면 우리의 말이 무엇으로 가득한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의 말, 찬양의 말, 살리고 위로하고 회복하는 말, 기도의 말, 믿음의 말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16-17절은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은 그발이 피 흘리는데 빠르다고 하며 파멸과 고생이 그의 길에 있다고 하며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발이라는 것은 결국 온 몸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 몸이 어디에 거하게 하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은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상처주고 남의 것을 뺏고 남에게 해로움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죄의 상태는 순서를 역전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는 사랑의 순서를 역전시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인간의 상태는 사랑의 방향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위한 것들만을 찾고 이웃으로 부터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중에 하나가 십자가인 이유는 이기적인 옛 자아를 죽음으로 처리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고 여러분 여러분이 지옥에 갈 사람들이라는 두려움이나 걱정이나 불안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롬1:17에서 바울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처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그때에 우리의 모든 원죄와 자범죄가 깨끗하게 씻기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부패성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죄가 남기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에대한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성, 오염성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죄에 대한 책임으로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은 여러분들은 이제 그 사망의 무거운 짐에서는 벗어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유한한 세상에서 유한한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 부패성을 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보혈로 씻으며 이 죄를 이겨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보혈로 완전히 원죄가 씻긴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믿으시기를 다시 한번 축언합니다. 그리고 죄의 영향력의 모습이 보이신다면 그것을 깨끗이 씻고 거룩한 곳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안으로 자꾸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때에 반드시 주님이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3. 율법의 유익(19-20)
19-20을 읽겠습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주는 유익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후에 율법을 지키는 것을 또한 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가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하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며 주님을 찾는 간절함입니다. 죄를 깨달을 때에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구원자를 열망하고 구원의 길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간절함이 있을 때 또한 기도하며 예배하며 은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신다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니을 경외함이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간절히 찾을 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