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미 다 주신 하나님
본문: 신명기 26:1-11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오늘 신명기 26장 말씀은 모세의 두번째 설교의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될텐데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낼지에 대한 꼭 기억해야 할 너무나 귀중한 규례를 신신당부하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26장은 신명기 전체를 요약해 주는 결론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땅에 가나안 백성들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성민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달리 믿음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이란 무엇인지, 그러면 그 신앙인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인지 그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는 말 입니다.
1. 선물로 주셨다 (1-3절)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원래 있던 땅이 아니라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첫번째 행동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첫번째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첫번째란, 가장 먼저 수확을 거둔것이도 하지만, 첫번째라는 의미는 가장 귀한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이런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가장 먼저 드려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신앙이란 나보다 하나님을 먼저 대접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첫번째 소산을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하나님께 드리면서 내가 어디서 부터 왔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의 뿌리와 근원을 기억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인 것이죠. 신앙이란 항상 내가 어디서 부터 비롯된 존재인지 기억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연스런 행동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신명기 말씀은 부모가 자녀에게 신신당부하며 일일이 하나 하나 가르치며 훈련하듯 몸에 베이게 하는 말씀이며,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듯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희 어머니는 신병을 앓고 자연스럽게 신을 업었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요, 모두가 잠든 그런 깊은 밤이면 어머니는 어린 저를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몸을 정결하게 씻으시고 새옷을 입으시고 자신은 맛보지도 못한 귀한 음식을 만들어서 상에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가 행위가 다 끝나면 우리더러 먹게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찮은 귀신에게도 이렇게까지 하면서 정작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식전 기도도 정말 감사하게 하나님께 올려드립니까?
과거 제 어머니의 그릇된 신앙일지라도 떠 올려보면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기도할때마다 언제한번 부시시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을 못 봤습니다. 항상 정결하게 씻고 깨긋한 옷으로 차려 입고 양말을 신으시고 기도올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만나 매일을 전도사인 저보다 더 성은교회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즘에는 제가 댓글을 그만 달라고 제제 하고 있습니다만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정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 모든 뿌리와 근원을 잊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되짚어 보고 다시 신앙의 길에 올바로 서야 될 줄로 압니다.
다 제 잘난 맛에 살죠. 다 제가 똑똑해서 살고, 제가 벌어서 살고 제가 베풀고 산다고 하지만, 어느것 하나 내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기억하는 아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첫번째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 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거쳐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죠.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 제사장이 있어야 할 예배가 가능한 그런 형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흩어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중앙 성소라고 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유일한 장소, 정해진 장소 모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규정했습니다. 왜냐면 가나안 백성들이 산당이라는 곳에 흩어져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흩어져 예배를 드리다가는 그들이 타락할 수가 있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흩어지지 말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훈련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걸 바꿔 주셨습니다. 당신의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고 나아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마태복음 6장에 주기도문이란 당신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라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서 만나는 간접적인 신앙체험이라면, 오늘 날 우리가 직접 나아가서 아버지라고 바꿔주신 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본질적인 은혜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공로라는 것입니다.
2. 출애굽과 입가나안(4-9절)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5절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을 떠나 밧단 아람에서 20년간 생활하였고, 그 이후에 세일과 벧엘과 브엘세바를 거쳐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또 야곱으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갈데아 우르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로 아람땅에서 기거하고 그쪽에서 주로 지냈기 때문에 아람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그리고 강성하고 번성하는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이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들을 주님께서 보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400년간 유아 살해 등과 같은 각종 박해와 종살이 하는 것을 주님께서 다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그 시간은 고통이 되었지만, 그 곳 애굽땅에 들어갈때 야곱의 식구들 70명이 들어가 60만 명이 넘어 한 민족이 되게 하신 것 그 시간을 거쳐서 애굽땅에서 다시 불러 내셨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여정이고 신앙고백인 동시에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요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불러내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지만, 세상에서 나와 본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출발조차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죠. 여러분, 교회란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끊어지는 경험과 단절의 경험이 없으면 절대로 신앙의 여정조차 안된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이 세상에 붙어 있기 위해 하나님께 메달려 있다면, 신앙이 출발조차 안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절망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소망이 끊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더 얻겠다고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출애굽은 오늘 날 우리에게 출세간과 같은 것이고 이것이 타종교에서 말하는 출가라는 것입니다. 집으로부터 나와 세상과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예전에 좋아했던 TV 프로그램이 생각이 났습니다. 다름아닌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인데요, 물론 거짓도 있겠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감탄사가 나왔던 부분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 내려놓고 물리적인 출세간을 하는 모습이 결단력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가진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털어봐야 먼지뿐이고, 변변한 것이 하나 없지만, 안락하게 살기를 원했고,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붙잡혀 메달려 살았습니다. 그래서 없는 놈이 더 가질려고 발악했고, 누구보다 열심을 내였고, 아득바득하며 살았는데요, 그것이 한 순간 부질없고 물거품이라는 것을 맛보고 나니 이 세상과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중심에서 한번 빠져 나오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고 아득바득 하려는 나의 힘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빼지도 않았는데 늘 더 달라고 기도만 하고, 그렇게 이미 다 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주시옵소서 더 주시옵소서하고 죽기살기로 이 세상에 메달려 있는 것이죠. 어쩌면 힘을 다 빼고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을 하나님은 보고싶어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마음을 다 비우고 힘을 빼면, 미워하는 마음도 실망하는 마음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뻐보일 것입니다. 만약 여전히 힘을 빼지 않고 계속해서 이 세상에 메달려 있다면 자칫 괴물같은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적어도 나를 비우겠다고 수련을 하는 타종교 사람들보다 훨씬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3. 예배의 본질 (10-11절)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앞에 경배하면 자연스럽게 공동체적인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었을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고아와 나그네들과 하나님에 대해 알리고 그들과도 함께 기뻐하게 되는 것이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예배의 본질은 나 혼자 신비롭게 하나님을 만나서 혼자서 복을 받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판타지적 경험을 하는 것이니라 모두와 즐거워 하며 함께 나누며 교제하는 것이라고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는 공동체적인 삶,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기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건 다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경험을 하지 않고 무슨 사회정의를 부르짖겠어요? 그것은 어쩌면 내 목적과 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목사가 될 수 있고 다른 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아와 나그네를 품지 못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망명되이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제 자신을 정검합니다. 만약 내 목표, 나의 목적을 위해 목회자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문을 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모든 좌절과 절망속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신앙의 뿌리와 근본을 놓치 않고 나아가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또 저와 여러분이 나는 어디로부터 왔다 어디로 가는지 기억하며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선인 2023년에, 진정한 출세간을 통해 입천국에 다다르는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