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 안에서 나눔
본문: 고전 16:1-4절
찬송가: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1. 연보의 본질적 원리 (1-2절)
어느덧 고린도전서가 마무리를 앞에 놓고 있습니다. 11월 한 달,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가진 여러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과 다를 게 없음도 알게 됐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 사도 바울은 성도들 간의 불화와 거짓, 그리고 비윤리적으로 교회 내 분열을 조정하는 것을 경고하면서 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2-14장까지는 우리가 영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진 수많은 은사 중에 결론은 모든 은사가 중요하지만 사랑의 은사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장이라고도 부르는 15장에서는 부활의 교리를 통해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활할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1절을 읽겠습니다.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오늘날 우리는 ‘연보’란 말 대신 ‘헌금’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1절에 ‘연보’를 헬라어로 ‘로기아’라고 쓰였습니디. ‘로기아’는 기부금이라는 의미가 담고 있는데요, 사실 본장에서만 ‘로기아’ 즉 기부금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그 밖에 서신서에서는 여러 의미로 쓰였습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연보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나타내는 ‘교제’의 의미인 ‘코이노니아’의 의미로도 쓰였고요,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랑으로 행하는 ‘섬김’의 의미인 ‘디아코니아’, 하나님의 대가 없이 주는 ‘은혜’의 의미인 ‘카리스’라고도 쓰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연보’는 단순히 돈을 모금한다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연보’는 세계 열방으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의 끈이라고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연보는 내가 주인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가 연보의 본질적인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함께 2절을 읽겠습니다.
2절.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두어서 내가 갈 때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오늘 본문 2절에서는 고인도 교인들에게 매주 일정한 금액을 따로 떼어놓으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맞닥뜨려서야 부랴부랴 모금하지 말고 미리미리 대비하고 준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월말이 다가오면 통장이 바닥을 보일 때가 있었는지요? 나름 아껴쓴다고 했는데도 언제 이렇게 빠져 났는지 놀랄 때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모아두는 습관을 기르라고 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설교문을 써 내려가다가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한 권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권사님은 늘 항상 주님께 드리는 헌금 봉투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봉투를 준비하십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모은 금액으로 혹여나 젊은 사역자들이 라면만 먹고 일 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일주일에 한번은 따뜻한 밥을 사 주십니다. 비록 저는 스케줄 상 그 자리에 자주 참석 못 하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과 그런 실천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곧 섬김의 디아코니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입니다.
사실 섬김과 나눔의 본보기 그러면 감리교 창시자이신 존 웨슬리 목사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처음 속회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성도들을 돌보는 돌봄 사역에서 시작되었고, 가난하고 어려운 성도들의 빚을 갚기 위해 서로 있는 것을 내놓으며 나누는 코이노니아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명을 갖고 그는 근검절약하면서 저축하여 많은 이들을 도왔습니다. 급변하는 시대, 가난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로 오늘날까지도 거론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안에서 나눔 (3-4절)
이제 바울 사도는 본문 3절과 4절에서 하나님 안에서 나누는 나눔이 얼마나 은혜롭운 행위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3절 4절입니다.
3절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3절에 ‘너희가 인정하는 사람’이란, 고린도 교회에 믿을만한 사람을 세워 그 사람에게 재정을 맡긴다는 것인데요. 고린도 교회의 공동체안에서 믿을만한 사람이 세워졌을 때 바울 사도의 추천 편지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로 ‘연보’를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의 성격을 알 수 있는데요, 그는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도 자신의 의견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의견을 존중하여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나 또한 가는 것이 합당하면’이란 것으로 보아 지금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직접가는 문제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만약에 바울 사도께서 가는 것이 맞다면 그때는 자신도 기꺼이 함께 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15장에는 바울 사도께서 직접 모금이 된 돈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내용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5절과 26입니다.
25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그렇다면 “왜 우리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위해 헌금해야 합니까? 왜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에 있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지 않고 왜 우리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을 도와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발생한 교회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과 고난의 압력을 받으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흩어지게 되었다고 주석서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회적으로 유력하거나 부유한 사람들은 다 떠나고 극도로 궁핍한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고 성경학자인 ‘켐벨 모간’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부룬디 교회에 선교헌금을 보내는 겁니까? 예루살렘의 교회가 되었건,고린도 교회가 되었건, 한국의 교회가 되었건, 부룬디 교회가 되었건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다면, 우리가 한 믿음, 한 성령 안에서, 한 교회 공동체라고 한다면, 서로 나눌 수 없을게 무엇입니까?
로마서 15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절.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영적인 것을 나눠 받았으면 물질이나 하다못해 육적인 것이라도 돌려주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3주를 함께 하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었습니까? 그들은 물질이나 재물을 나눠주진 않았지만, 영적인 것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우리 또한 차고 넘쳐서가 아닌 기쁜 마음으로 섬기고 그들과 교제했습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나누고 섬길 때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은혜가 배가 되는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섬김과 교제는 아주 작은 배려와 나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삶에 어떤 이득을 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연보가 이루어졌을 때, 모든 것이 하나님께 기쁘게 드려지는 헌금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교제가 되는 것이고, 그런 행동 하나까지도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제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보내지고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보’할때 절대 기쁨으로 마음에서부터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이는 곧 우리의 자랑거리나 교만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유익을 위해서, 내 체면을 위해서, 내 이름을 위해서 드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연보가 아님을 이 아침 기억하고 저 문을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주일 날 아침, 본문 내용이 ‘연보’ 헌금과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저에게는 참 부담스러운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돈이라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 돈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또 자유로워야 한다면, 당연히 교회가 그 시작이어야 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꿈을 쫒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하여 헌금도 거두어 들이게 하시고, 또 그 헌금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나눠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아침, 저와 여러분은 그런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갑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비겁하게 살지도 않고 오직 복음과 진리인 하나님만 의지하고 성령님께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