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두 관원장을 만나다. 6월 19일 새벽설교 (김서윤 전도사)
제목: 요셉이
두 관원장을 만나다.
말씀: 창세기 40장 7-8,12-15절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의 시기 질투로 이집트의 노예로 은 20에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 친위대장인 보대발의 집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요셉의 인성은 늘 정직하고 성실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에게까지 총애를 받으며 단순 노예가 아닌 그의 집을 총괄하는 총무로 일하면서 그 집안의 모든 재산을 통솔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머리가 비상하고 인성이 좋으며 외모도 빼어났던 요셉은 그렇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역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노예의 신분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요셉을 믿고 총애했던
보디발은 심히 노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왕과 관련된 죄수들이 수감되던 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성실함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간수장은 요셉에게 옥중 죄수들을 다 요셉의
손에 맡기고 그 제반 사무까지 요셉이 처리하게 합니다. (39장21-23절)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크게 세가지의 메시지를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요셉처럼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하며 하나님 앞에 진실했기에 세상 앞에서도 당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요셉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요셉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가 비록 역으로 누명을 쓰면서까지 정치범 수용소와 같은 옥에 갇혔지만, 그의
인생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요셉의 보직이 바뀐 것과 같습니다. 노예로서의 총무나 죄수로서의 총무 역할이나 상황은 조금 더 어려워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가 하는 일에
본질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40장 1절에는 ‘그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하게 됩니다.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서는 ‘그 후에’을 ‘그 일들이 있은 후에’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여러분, ‘그 일들이 있은 후에’ 어떤 일들입니까? 요셉은 히브리 사람이었지만, 이집트로 노예의 신분으로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고, 또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고 또 감옥에서 그가 하는 모든 수발을 말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노예의 신분인 요셉의 일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가 노예로 왜 팔려 왔는지? 어떤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세상 사람들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후에’라는 함축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그에게
주목을 끌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일은 곧바로 그 당시 이집트 왕실의 큰 사건이었던 일과 연루되어 식음료를
맡은 고위간부인 관원장을 두 명을 왕실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에 가두면서, 그 감옥에 있는 요셉을
주인공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관원장들을 돌보게 됩니다. 이것이 1-4절까지 이야기입니다.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King James 영어 성경에는 이 두 관원장을 한 명은 왕실에 음료담당 최고의 권위자인
chief란 명사로 쓰였고, 또 한 명은 베이커리의 chief으로 두 사람 다 최고의 권위자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보아하니 그 두 사람은 모두 근거리에서 왕의 식음료를 책임지는 최고 권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옥에 갇힌 것으로 보아 왕에게 혹은 왕실에 독살과 관련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간의 이목 가운데 공교롭게도 노예의 신분인 요셉이 갇힌 옥에서 그들을 요셉이 보필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은 두번째 포인트에 주목하게 됩니다. 요셉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본문 5-7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서 봤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은 지금 노예의 신분에다가 또 죄수가 되어 감옥에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그들이 근심이 있던 슬픔이 있던 그게 요셉 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지금 어떤 신분인데? 그리고 본인은 어떤 상황인데? 본인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그런 것들이 보이겠습니까?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있던 기쁨이 있던 그와는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 자기 일이 아니면 신경 쓰지
말라’ 그리고 저희는 ‘중용’ 또는 ‘중도를 걸으라’는
동양의 철학에 의해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특히 개인주의 성향이 점점 재조명되고 있는 이 시대에는
더더욱 남이사 어떤 얼굴을 하던 상관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요셉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말입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와서 그들을 봤는데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있는 걸 헤아려 알았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타인을 이해하고 헤아릴 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의 큰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돈이나 지위하고는 달라요. 돈은 쓰면 쓸수록 없어지지만, 헤아림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역지사지로 이것은 쓰면 쓸수록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 몸에 운동을 하면 근육이 계속 생기는 것처럼 쓰면 쓸수록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먼저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근심하는 분들을 보면, 무심코 지나가는 것이
아닌, 먼저 다가가 “무슨 힘든 일이 있어요?”라고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을 가십거리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또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휘말리라는 그런 말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헤아릴 줄 아는 헤아림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물어봅니다. 그러자 그 관원장은 자신들의 지난 밤에 꾼 꿈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며 근심합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꿈은 곧 신이 자기 인생과 역사를 섭리한다고 믿었기에
신이 꿈을 통해 계시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꿈을 해석하는 책이나 꿈을 풀이해 주는 전문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감옥에 있으니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이 쌓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셉은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꿈이라는 것은 그 해석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하나님은 요셉의 하나님이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요셉은 겸손한 말로 그들에게 말합니다. 8절입니다.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여기서 “청하건대”라는 표현은
영어 성경에는 please 라고 쓰였고요, 이는 매우 겸손한
말투이며 고상한 말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는 “당신이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그 꿈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의 문제를 제가 함께 해결하고 싶습니다”라는 뜻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9-13절입니다.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그리고 요셉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 14절입니다.
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당신이 잘 풀려서 당신이 잘 됐을 때, 바로 왕 앞에서 저를 기억하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그렇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은 은 이십에 팔려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로 팔려오게 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자신들의 가족이 자기를 버렸고 또 노예로 팔았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저 같으면 없었을 거 같습니다. 어쩌면
자신을 인정해 주는 이집트 보디발의 집에서 국적을 바꾸어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수년이
흘려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본질을 잊지도 않았고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세간에
손가락질을 당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의 사람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보게 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나쁘다고 하더라, 그들은 이중적인 삶을 산다고 하더라.’ 이런
말들을 할 때 자신의 입으로 ‘저는 크리스쳔입니다.’ 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때로는 말보다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며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아, 그는 예수의 사람이었어!”라고 떠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성경을 통해 요셉이
그의 신분이 어떻던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떡 굽는 관원장이 꿈 해몽이 좋은 걸 보더니 자신의 꿈도 들려주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뭐라고 합니까? 그에게도 좋게 해석해 줬을까요? 아닙니다. 요셉은 당신은 사흘 뒤에 머리가 나무에 달린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요셉의 그런 거침없는 말에 ‘참, 강단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흘 뒤에 머리가 달린다는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냐’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요셉이 강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는 당당하게 전할 수 있었고요, 하나님 앞에
항상 정직하고 말씀 앞에 신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태도인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좋아하는 말이든, 아파하는 말이든, 듣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말이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그는 신실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두려워했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 대목에 집중해야 하며 요셉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하게 살았다는 것을,
어떤 지위나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나 신분이나 그런 것들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연기를 하거나 복종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이 문을 나가게 될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진심은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오래 남게 되며 거짓은 너무나 얄팍해서 얼마 못 가고 드러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말 합니다. 과연
술 맡은 관원장은 그를 기억하게 될까요?
40장 마지막 절입니다.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네,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다고 합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사람이
절망가운데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 심정, 여러분들은 있으십니까?
그리고 부탁받은 사람은 ‘그래, 알겠어. 도와 줄게!’라고 했지만 그 약속과 기대는 점점 더 멀어져 갈 때, 혹은 기대이상으로 한없이 추락할 때, 최악이라고 생각할 때,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인 사랑으로 기적을 약속으로 드러내시며 하나님만의 기회가 나타나게 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술 맡은 관원장은 2년 뒤에 그제서야 잊고 지냈던 요셉을 떠올리고 기억해내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왕이 꾼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자 그제서야 요셉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41장 9절입니다.
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었음에 놀라 자신의 죄를 기억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죄의 고백은 자신의 꿈을 해석해 준 고마운 요셉이었습니다. 하지만 배 부르고 등 따시면 힘들었던 과거를 쉽게 잊게 되는 것이 사람임을,
또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줄을 압니다.